현재의 유일한

유일한 박사가 남긴 다양한 업적과 그가 살아온 생애를 이 시대의 모습으로 상상해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흑백 사진 속에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모습으로 유일한 박사를 만나보자.

  • 당시, 최연소 조기 유학 ? 9세 때 미국으로 조기 유학 (1904) 유일한 박사는 당시, 최연소 조기 유학생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9세 아이를 혼자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100년 전 한성(서울)도 밟아보지 못한 9살 아들을 미국이라는 멀고도 낯선 땅으로 보내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었다. 그것도 집안의 장손을 말이다. 선진국에 가서 앞선 문물을 익히라는 아버지 유기연 공의 결단과 선견지명이 9살 아들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1904년 도미직전 유일한 박사
  • 성공한 30대 청년사업가 27세 첫 사업, 250억 자산가 27세에 아이디어 하나로 사업에 뛰어들어 31살에 250억 원의 자산가가 된 청년 사업가가 있다. 그가 바로 유일한이다. 잘 나가는 대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에 사표를 던지고 ‘라초이 식품회사(La Choy Foos Product Inc.)’를 설립, 6년 만에 2백만 불 (현재 가치로 250억원 상당) 자산의 회사로 성장시켰다. 라초이 식품회사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숙주나물 사업을 시작해, 미국 전역에 동양 식료품을 취급하는 회사로 유명해진다. 창업 6년 후에는 직원이 400명에 이르고 일년 매출이 당시 2백만원에 이르는 큰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성공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정리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 그의 나이 31세 때 일이다. 1926년 귀국당시 동아일보에 게재된 유일한부부
  • 시대를 앞서간 혁신가, 유일한 박사 유일한은 누구보다 혁신적이며 시대를 앞서간 기업가였다. 해방 전, 연말 보너스는 누가 가장 많이 받았을까? 바로 그 해 시말서를 쓴 직원이다. 실패보다 새로운 시도 자체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한 1960년대 약품의 유통구조를 좌지우지 하던 도매상의 횡포에 맞서 소매상과 직거래를 하는 특약점을 개설한 것도 유한양행만이 할 수 있는 혁신이었다. 당시 파격적인 판매전략 혁신으로 1961년 전국 260점포이던 특약점은 1976년에 5,260개에 이르게 된다. 1928년 최초의 기업이미지 광고 제작, 1960년 국내 최대 규모의 한강변에 거대 광고탑 제작, 1960년 100페이지 분량 ‘가정생활’ 여성잡지 국내 최초 DM 발송 등도 유한이 만든 혁신이다. 42세의 유일한 박사
  • 국가를 위해 특수부대 입대하는 50대 CEO 쉰을 바라보며, 명망있는 사업가이자 두 자녀의 아버지인 유명 CEO가 국가를 위해 특수부대에 입대한다면 어떨까? 말도 안 되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몇 십배는 더 말이 안 되는 일을 유일한 박사는 하셨다. OSS(미 전략 첩보국)의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Napko)작전. 태평양 전쟁 시 조국 독립을 위해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미국 카타리나 섬에서 특수 훈련을 받고 한반도에 침투하기로 된 무장 비밀 요원들이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젊은이들도 거절하던 그 일에 조국 광복을 위해 투신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낙하훈련이라니. 가족도 있고 고국의 기업도 있는 그가 내린 이 결정은 그의 애국심의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국가를 위해 특수부대 입대하는 50대 CEO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탄생 평소 검소한 생활과 거액의 기부, 가치투자의 귀재 등으로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는 워렌버핏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요즘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화두이다. 하지만 이를 40여년 전 몸소 실천하신 분이 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기업활동이 사회적 기여 활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돌아가신 유일한 박사. 그 숭고한 정신과 전무후무한 기업이익의 사회공헌 시스템 구축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유일한의 사회적 업적이다. 40년 전 워렌버핏